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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달리트 불교운동의 지도자 암베드까르 박사③-신종교운동(불교)-13 매일종교신문 Dr Lee Chi Ran





















▲ 매년 10월 14일 딕샤부미 수투파에 수십만 명이 모여서 암베드까르 박사를 추모하 고 개종선언대회 기념법회를 개최한다.     © 매일종교신문



암베드까르 박사의 주도로 힌두에서 불교로 개종선언대회를 열고난 다음, 인도사회에서는 엄청난 파문이 일었고, 특히 힌두교를 기반으로 하는 계층제 사회에서는 지각변동이 발생했다. 수천만 명의 지정카스트와 부족들은 동요했다. 반면에 힌두 지도자들은 하층계층인 지정카스트의 개종으로 인한 사회구조상의 변동에 민감했다. 개종선언대회를 계기로 달리트 들에게는 희망이 생겼고, 인도사회는 구조적 변화물결이 일었다. 달리트 불교운동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북부만이 아닌 인도 남부의 타밀지역에도 영향이 미쳤다. 인도 남부의 타밀 지역은 한 때, 불교가 흥성했던 지역으로 동아시아의 선불교 초조로 추앙받는 보리달마대사가 바로 남인도 타밀나두 칸치푸람 출신이다. 보리달마는 5세기 중국의 북위(北魏386-534CE)에서 활동했다.
 













▲ 남인도 출신인 선종초조 보리달마.     © 매일종교신문


당대 중국의 불교가 교학(敎學)에 치우친데 반하여 보리달마는 명상에 포커스를 두고《능가경 楞伽經 Laṅkāvatāra Sūtra लंकावतारसूत्र》을 가르쳤다. 보리달마는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28대 조사(祖師)가 되고, 동토(중국)에서는 초조(初祖)가 된다. 이《능가경》은 스리랑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대승경전이다. 스리랑카는 바로 이 남인도권 불교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망하고 사라진 다음에는 스리랑카가 인도불교의 원형을 보존하는 상좌부의 종주국이 되었지만, 보리달마 시대만 하더라도 스리랑카는 남인도 불교권에 속했다. 이《능가경》의 교의(敎義)는 요가차라(瑜伽行派 Yogācāra)와 불성(佛性Buddha-dhātu)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보리달마의 전기(傳記)는 인도보다도 중국에서 지방 태수(太守)를 지낸 양현지(楊衒之)란 사람이 547년에 편집한《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서 보리달마에 대한 간단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낙양의 사찰과 승려들에 대한 기록인데, 양현지는 보리달마가 페르시아에서 왔는데, 보리달마는 스스로 말하길 “나는 150세이며, 가보지 않는 나라가 없다.”란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경전을 암송하고 항상 합장한 채, 비구로서의 예(禮)를 다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그는 남인도 출신으로서 북인도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를 가보는 등, 해로로 중국남부 광동성(양나라)에 도착해서 낙양으로 갔다가 숭산 소림사에서 주로 주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벽안(碧眼)의 중앙아시아 승려(左)가 중국의 승려(右)에게 불교를 가르치고 있는 투루판 베제클릭 천불동 동굴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     © 매일종교신문












▲ 투루판 베제클릭 천불동     © 매일종교신문

이밖에도 인도불교사에서 불교사상가들로서 큰 획을 그은 당대의 대석학들인 디그나가(Dignāga480-540CE陳那), 붓다고사Buddhaghosa 覺音 5세기)와 담마팔라(Dhammapala 護法)등이 타밀나두 칸치푸람에서 가르쳤다. 남인도의 팔라와 왕조(3-9세기)의 마헨드라와르마 1세 왕(재위600-630은 대학자로서 음악가였으며 산스크리트 작가였다.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반도 또한 남인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남인도 불교권이었다. 말하자면 남인도 역시 불교권이었지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면서 남인도에도 많은 타밀출신 하층들이 많았었는데, 이들에게도 달리트 불교운동은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달리트 불교운동의 개요와 개종선언 그리고 인도전역에서 개종이 이루어지고 조직화된 개종선언 대회 등을 간단히 살피면서 남인도와 스리랑카 북부 지역까지도 달리트 불교운동의 영역임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제 이 운동의 핵심인물인 암베드까르 박사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의 성장과 출세 그리고 사상을 알아보는 순서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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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드까르 박사는 1891년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군 야영지에서 군 간부인 람지 삭팔의 14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인도-이란어 계통의 마라타어를 사용하였다. 암베드까르는 태어나면서부터 불가촉천민으로서 사회경제적으로 차별을 받는 아웃사이더인 최하층 소속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암베드까르의 조상은 브리티시 동인도회사의 군인으로 일을 했다. 그의 아버지 또한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 군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브리티시 인디아 군은 1895년부터 1947년까지 가장 활동적이었다.
 
암베드까르는 학교에 들어갔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차별받고 선생의 배려를 받지 못했다. 불가촉천민 출신 아이들은 교실에서 의자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층출신 아이들이 마시는 물이나 물그릇에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차별받았다. 암베드까르 어린이는 이런 물심부름을 했고, 이런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는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암베드까르 박사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심부름이 없으면 물도 없었다,”라고 썼다. 그는 의자 대신 자루 위에 앉아야 했고, 집으로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의 아버지 람지 삭팔은 1894년에 은퇴를 하였고, 그의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고 아이들은 그의 고모 손에서 양육되었다. 암베드까르를 포함 3남 2녀만이 살아남았다. 형제들 가운데 암베드까르만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암베드까르의 성은 본래 암바와데까르였는데, 그의 브라만 스승의 성이 암베드까르였는데, 스승의 배려로 성을 암베드까르로 바꿔서 학적부에 등재할 수 있었다. 암베드까르의 가족은 봄베이로 옮겼고, 불가촉천민으로서는 유일하게 한 유명한 고등학교에 등록할 정도였다. 1906년 15세 때 9세 소녀와 중매로 결혼을 했다. 첫 부인은 1935년에 사별했고, 1948년 사비타와 재혼했다. 1907년 그는 봄베이 대학 부속 칼리지에 입학했고, 불가촉천민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1912년 정경(政經) 전공으로 봄베이 엘핀스톤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지방정부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던 차 15세 소녀인 부인이 가족과 합류하고 아버지는 1913년에 돌아가시는 등, 가족의 사정이 바쁘게 돌아갔다. 1913년 그는 인도 지방정부 주지사의 장학금으로 미국행을 해서 컬럼비아대학에서 3년간 공부했다.  














▲ 법정변호사가 된 암베드까르 박사(1922년)     © 매일종교신문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경제를 전공하고 사회학 역사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했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16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 그레이 법학원에서 변호사자격을 취득하였다, 런던 정경대학 박사과정에 등록했으나 장학금 수여기간이 만료되자 귀국길에 올랐고, 그가 부친 도서를 실은 배가 독일해군의 어뢰를 맞고 침몰하여 많은 귀중한 자료를 수장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그는 4년 안에 런던에 와서 논문을 내도록 허락받았고, 1921년 석사논문을 완성했는데 논제는 “인도 루피(화폐)”였다. 1923년에는 법학박사와 문학박사 학위 등을 받았다. 1922년에는 지방정부에서 법정변호사로 활동했고, 군서기로도 임명되었고, 얼마가지 않아서 사직하고 개인교사 등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사업도 해봤지만, 불가촉천민이란 벽을 뚫을 수가 없었고, 결국 그는 봄베이대학 교수가 되었다. 학생들과는 사이가 좋았으나 다른 교수들이 물주전자를 함께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암베드까르 박사는 불가촉천민들의 다른 종교공동체와의 분리 선거에 대해서 논쟁했다. 그는 법정에서 변호사로 다시 활동을 했고, 불가촉천민들의 교육문제와 사회경제적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달리트의 권익을 위해서 간행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봄베이지역행정위원회 위원이 되어서 영국의회에서 파견된 위원회와 함께 인도 자치헌법을 만드는데 참여했으나 인도전역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암베드까르 박사는 미국과 영국 유학을 통해서 배운 법학 실력으로 인도 미래의 헌법이 될 초안을 혼자 힘으로 만들었다.
 
1927년 암베드까르 박사는 불가촉천민의 최하층신분에 대한 반대운동을 하기로 작정하고 일종의 행진을 시도했으며, 불가촉천민들에게도 똑 같이 마실 물을 공개적으로 개방하도록 요구했다. 밥은 물론 물조차 함께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차별받는 불가촉천민들의 권익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불가촉천민들에게는 힌두사원에 들어가서 예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에 힌두사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무저항불복종운동(satyagraha)을 전개하고 힌두 고전인《마누법전》을 비난했다. 《마누법전》은 카스트 차별과 불가촉천민에 대한 신분을 규정하는 이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927년 12월 25일 그는 수천 권의 《마누법전》을 소각하는 퍼포먼스를 개최했다. 1930년에는 3개월 준비 끝에 2만 명이 모여서 칼라람 사원(Kalaram Temple)에 들어가는 운동을 벌였으나 힌두의 브라만들이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1932년 뿌나 협정이란 브리티시는 분리된 선거를 하도록 권고했으나 간디는 반대했다. 힌두공동체의 분열을 우려해서이다. 간디는 교도소에서 단식을 하면서 반대투쟁했다. 암베드까르 박사와 간디지지자들은 합동회의를 가졌다. 1932년 9월 25일 뿌나협정으로 알려진 암베드까르와 힌두들간의 협정에 사인했다. 국회의원 총선에서 최하층 카스트에게도 의석을 주는 것으로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다.
 
1935년 뭄바이 법과 대학의 학장으로 초빙되어 2년간 재직하였다. 뭄바이 법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1936년 암베드까르는 뭄바이에서 독립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처음 독립노동당은 군소 정당으로 출발하였으나 불가촉천민 및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영국령 인도의회로 진출하면서 3석, 11석, 4석을 얻었지만, 그는 이들을 통해 의회 내에 신분제 철폐 운동을 주도하였고, 총독부의 노동부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해, 첫 부인 라마바이가 오랜 병석 끝에 사망했다. 첫 부인 라마바이는 힌두 성지 순례가 소원이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암베드까르는 죽은 아내 라마바이를 불가촉천민 등록대장에서 삭제해줄 것을 힌두교 측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947년 인도는 독립하면서 암베드까르 박사를 초대법무장관으로 초빙하고 헌법기초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암베드까르 박사 주도의 인도헌법은 1949년 11월 26일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1951년에는 내각에서 사임했는데, 그가 성안한 힌두 법안 가운데 상속법과 결혼에 대한 양성평등의 법안이 계류되면서 1952년 인도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지명도가 약해서 낙선했고, 상원의원에 임명되었다.  














▲ 인도하원의회(Lok Sabha)에서 의장선출을 하고 있는 모습.     © 매일종교신문












▲ 인도의회 상원(Rajya Sabha).     © 매일종교신문

암베드까르 박사는 인도헌법을 기초하여 인도 공화국이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초대 법무장관과 상원의원을 역임했지만, 불가촉천민이란 신분 세탁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인도는 독립 당시에는 영국 국왕을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하였으나, 1950년 1월 24일부터 현재까지 공화국이 되었고, 인도는 대통령이 의례적인 원수로 상징되는 의원 내각제를 채택함으로써, 총리가 모든 권한과 실권을 가지고 있다.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방공화국인 인도는 29개주와 7개 연방직할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는 연방정부와 이들 주정부 간의 역할 분담에 의해 국정이 운영된다. 연방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획·실행되어야 할 여러 포괄적인 사항들, 즉 국방,외무,거시경제,교통·통신,화폐 주조,대법원과 고등법원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그 외의 치안, 공중보건, 교육, 임산자원 관리 등 지방행정업무의 성격을 띤 분야는 주정부에서 담당한다.
 
이런 인도 공화국의 건국 헌법을 기초한 암베드까르 박사였지만, 정작 본인과 그가 속한 달리트들의 인권과 인도시민으로서의 권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해동불교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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