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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실크로드기행③흉노와 만리장성-흉노는 서역개척과 실크로드를 있게 한 주어이자 직접목적어/매일종교신문 이치란 박사






















▲ 내몽골 울란하오터 칭기즈칸 사당 광장 앞에선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흉노는 서역개척과 실크로드를 있게 한 주어이자 직접목적어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중국 영토내의 실크로드선상에서 당장 부딪치는 현실문제가 중국과 위구르족의 대립이었다. 타림분지의 쿤룬산맥 쪽은 티베트인과도, 내몽골지역은 몽골족과도 그리고 파미르 고원에서는 타지키스탄인들과도 긴장상태였지만, 위구르족과는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시한폭탄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위구르족과는 빈번하게 우루무치 등지에서 충돌은 일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중국정부는 이 지역에서 감시를 심하게 하고, 위구르족들은 지나친 감시와 안전검사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 같은 한국 출신 여행자는 유.불리(有不利)가 교차했다. 여권을 보지 않는 한 , 중국 측에서 보면 나는 중국인에 속하고, 여권과 상관없이 위구르족에게는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위구르족에게 한국인이라는 신분이 드러나면 미소로써 대해주는 이방인이었고, 조금 역사를 아는 식자에게는 위구르족이 투르크계(터키)란 뿌리에서 우랄알타이어족의 형제라는 데에 까지 진전되었다. 하지만 결코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이었다. 신 실크로드 선상에서 느끼는 불편한 현실문제는 뒤로 미루고 고대 초기 실크로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 기원전 약 250년 경 좌우 흉노의 강역(녹색부분).     © 매일종교신문


실크로드를 리서치하면서 가장 먼저 대두되는 명사가 흉노와 만리장성이었다. 실크로드라는 단어는 나중에 무역로가 형성되면서 비단이 주류 품목이었기에 19세기에 붙여진 학술명이고 주요 키워드는 흉노이고 다음은 만리장성이었다. 사실 서역개척이란 것도 알고 보면 흉노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었다. 흉노는 그만큼 서역개척과 실크로드를 있게 한 주어이며 직접목적어였다. 흉노를 다루지 않고서는 실크로드 기행을 빗겨갈 수 없다. 하지만 흉노의 전모를 다 밝힌다는 것은 방대한 분량의 한권의 사서(史書)가 될 수밖에 없고, ‘실크로드기행’은 흉노만 다루다가 다 끝내지도 못하고 종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편적인 개략(槪略)의 소개가 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만리장성과 함께 서술해보자.
 
흉노에 대한 중국의 사료는 사마천(司馬遷)의《사기.흉노열전 史記·匈奴列傳》,반고(班固)의 《한서.흉노전 漢書·匈奴傳》, 범엽(范曄)의《후한서.남흉노열전 後漢書·南匈奴列傳》과 당수(唐修)의《진서.북적흉노전 晉書·北狄匈奴傳》등이 대표적인 사서라고 하겠다. 실크로드의 본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서역(西域)에 관한 사료는《사기.대완열전 史記·大宛列傳》,《한서.서역전 漢書·西域傳》、《후한서.서역전後漢書·西域傳》,《진서.서융전 晉書·西戎傳》、《양서.서북제융전 梁書·西北諸戎傳》,《위서.서역전 魏書·西域傳》、《주서. 이역전하周書·異域傳下》,《수서.서역전隋書·西域傳》、《남사.서역제국전南史·西域諸國傳》、《북사.서역전北史·西域傳》과《삼국지三國志》,《위략.서융전魏略·西戎傳》등이다. 우선 흉노에 대한 필자가 읽은 사서는《사기.흉노열전》과 《한서.흉노전 漢書·匈奴傳》이다. 이 밖에 영어 일어 중국어(한문) 등의 흉노에 대한 자료 검색 등을 통해서 흉노에 대한 대강의 역사를 압축해서 만들어보고자 한다.
 
흉노(匈奴)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걸쳐서 아시아 초원지대를 장악한 중국북부 지역에 존재했던 유라시아 유목민의 연맹체였다. 흉노 제국은 기원전 209년 묵돌(묵특)선우(Modu Chanyu 冒顿单于 234-174BC)가 건국해서 35년(재위209-174BC)간 다스린 유목제국이었다.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의 바야투르(Bayatur 용감한 자)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통일시기와 동시대에 묵돌 선우가 유목 세계의 패권을 잡은 이래, 진한(秦漢) 제국과 맞먹는 적수가 되었고, 한 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당해 큰 곤경을 겪은 후, 흉노와의 화친(和親)으로 한나라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등, 항상 편치 않는 긴장관계를 유지하다가 한 무제에 이르러서 30년간의 전쟁으로 흉노는 피폐해 졌다고 한다.
 













▲ 흉노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 진시황제는 몽염 장군에게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 매일종교신문












▲ 북경근교 팔달령에서 본 만리장성.     © 매일종교신문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성(長城)이라고 부른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 시대의 제(齊)나라에서 시작되어, 전국시대에 이르면서 초(楚)·위(魏)·연(燕)·조(趙)·진(秦) 등의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국가들이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기원전 222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중국 안에 있던 장성은 파괴하고 흉노를 막기 위해서 북쪽에 만들어졌던 성들을 보수하고 서로 연결하여 장성을 쌓았다고 하며, 몽염 장군이 전담하여 기원전 214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한 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시켰다고 하며, 후한 시기에는 흉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이후 수백 년 동안 장성의 개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장성의 간략한 역사이다.
 
흉노는 진시황이 죽고 몽염 또한 죽자, 묵돌선우의 아버지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내몽골) 지역을 회복하고 이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 그는 아들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내고 후궁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자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묵돌은 월지의 명마(名馬)를 훔쳐 타고 흉노로 돌아오자 두만은 그를 가상하게 여겨서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을 거느린 기병대장이 되게 했다. 후궁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상황에서 그의 위치가 불안하자 ‘소리 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가지고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가 되었다고 한다.
 













▲ 흉노제국을 건설한 묵돌선우(234-174BC).     © 매일종교신문


묵돌선우는 오늘날의 몽골, 동부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물론 남부 시베리아의 초원지대와 중국의 간쑤. 신장성 등을 지배하게 되었고, 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싸우면서 중국의 서역 진출을 가로막았다.
 
사마천의《사기.흉노열전》에서, “하.은.주 삼대 이래로 흉노는 항상 중국의 환해(患害)였다. 한실(漢室)은 흉노의 강하고 약한 시기를 알고 대비하여 이를 치려했다. 그래서《匈奴列傳第五十》을 지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에 의하면, 흉노의 선조는 하후<夏后(禹)>씨의 후예로 순유(淳維)라 불렀다고 했으며, 당(요임금).우(순임금) 이전에는 산융(山戎).험윤(獫狁).훈육 등의 여러 종족이 북쪽의 미개척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주나라 때의《周礼》《易経》에서는 土方,鬼方,馬方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흉노는 주로 말.소.양을 길렀고, 낙타.나귀.노새.도도(靑色馬).타해(野生馬)등도 있었다고 한다. 물과 들을 따라서 옮겨 살았기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도 짓지 않았지만, 각자의 세력 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했다고 적고 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을 당겨 새나 쥐 같은 것을 쏘고, 조금 성장해서는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고 한다. 장정이 되면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서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고, 싸울 때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먼 거리 무기는 활과 화살이었고, 가까운 거리는 칼과 창이었다고 했으며, 싸움이 유리할 경우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는 물러나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알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이익이 될 만하면 그것을 얻으려 하며 예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흉노의 정체를 대강 짐작할 수 있으며, 왜 오랑캐라고 불렀는지 그것도 흉악한 오랑캐라고 했는지를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흉노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나타났고, 주나라 때부터 중국을 침입하여서 진 나라 시기에 이르면 장성을 쌓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고, 진나라 시황제는 몽염 장군에게 10만 군사를 주어서 흉노를 치게 하고 장성을 완성하도록 했다. 이 무렵에는 흉노와 함께 동호(東胡)와 월지도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나라가 망하고 몽염도 죽자 흉노는 월지를 몰아내고 다시 남하하여 감숙성과 섬서성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한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어 한나라와 일전을 불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무렵 한군(漢軍)은 항우와 싸우느라고 지쳐있었고, 묵돌은 30만 대군을 거느린 선우(군왕)로 등극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흉노는 묵돌선우에 이르기까지 1천년동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247-195BC)은 한나라(漢)의 초대 황제(재위:202-195BC)였다.     © 매일종교신문


흉노와 한나라간의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한 고조 유방이 포위된 사건이다. 한나라는 중화를 평정하고 한 왕(漢王) 信을 代로 옮겨 마읍이란 곳에 도읍을 정하게 했으나 흉노의 침입으로 한 왕이 항복을 하자, 한 고조는 친히 정벌하고자 32만 병력으로 출병, 고조 자신이 선두에 서서 진군했으나, 묵돌은 40만 정병을 지휘하여 고제(고조)를 백등산(白登山) 위로 몰아넣어 곤경에 처하게 했다. 흉노에게 포위당한 고제(高帝)는 선우의 부인 알지(閼氏)에게 사자를 보내서 선물을 주고 겨우 풀려났다.
 
알지는 묵돌선우에게 말하길,
“두 나라 임금이란 서로가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한 나라 땅을 얻어 보아야 선우께서 그곳에 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왕(漢王)은 신병(神兵)의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선우께서는 부디 이런 점을 살펴 주십시오”라고 건의하자, 묵돌은 모른척하고 퇴로를 열어 주었다고 한다. 묵돌은 합류하기로 했던 한 왕 신(信)의 장군 왕황(王黃).조리(趙利) 등이 기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한 나라와의 사이에 내통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알지의 말을 받아들여 포위망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한편 알지는 만일 묵돌 선우가 한나라에 오면 한 나라 미인을 사랑하게 될 것이란 말에 묵돌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런 꾀는 진평(陳平)의 헌책이었다고 한다.
 
이후 한 고조 유방은 유경을 사신으로 보내서 화친을 맺을 것을 약속했다. 한 왕 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자, 자주 약속을 배반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번쾌(樊噲)를 시켜 이를 치게 했다. 이에 한 고조는 유경을 시켜서 종실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서 선우의 알지로 보냈고, 해마다 흉노에게 일정량의 무명.비단.누룩.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하고 형제로서의 약속을 맺어 화친했다. 묵돌도 한동안 침략을 중지했으나, 연 왕(燕王)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게 항복한 다음, 한 나라 땅에 침범, 괴롭혔다. 고조가 죽고 효혜제(孝惠帝) 시대에 들어와서 흉노는 거만을 부리고 고후(高后)에게 망언의 편지를 보내서 우롱했다고 하며, 이에 고후는 흉노를 치려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화친을 약속했다. 고조의 넷째 아들인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고 화친의 약속을 했음에도 흉노는 하남 땅을 침입하여 인민을 살해하고 약탈해서 효문제는 관영에게 거기(車騎) 8만 5천을 징발케 하여, 치게 했으나 흉노의 우현 왕(右賢王)이 패주해 버려서 수포로 돌아가고 효문제는 장안으로 돌아 왔다.
 
얼마 후, 선우는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서, 한나라에서는 사신도 보내지 않고 흉노가 보낸 사신 또한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과 함께 한중 땅을 공격한 우현 왕을 그 징벌로서 월지를 치게 해서 월지를 서쪽으로 물리쳤다는 내용과 함께 화친을 도모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화전(和戰) 어느 것을 택하느냐를 놓고 의논을 하다가 결국 화친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효문제는 선물과 함께 화친의 편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묵돌이 죽고 그의 아들 계육이 뒤를 이어서 노상선우(老上單于)가 즉위하자, 효문제는 종실의 딸을 공주라고 속이고 흉노에게 보내 선우의 알지로 삼게 하고 연나라 출신인 환관 중항열(中行說)을 공주와 함께 사부로 보냈다. 열은 흉노에 가는 것을 꺼려 사퇴했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이렇게 투덜거리고 떠났다고 한다. “내가 가면 반드시 漢 나라의 화가 될 것이다.” 라고.

흉노 땅에 가기 싫어했던 중항열은 흉노 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투항하고, 선우의 총애를 받았는데, 흉노가 한 나라의 비단.무명이나 음식 등을 애용하는 것을 보고, 열(說)은 선우에게 진언했다고 한다. 요지는 흉노가 한나라의 풍습을 따른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흉노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비단 옷을 입고 덤불 속을 다니면 견디지를 못하니 종전대로 짐승가죽 옷을 입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사신이 가지고 가는 나무 쪽 편지도 한 나라 보다도 한 치가 더 크게 하고, 내용도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한나라 황제에게...’ 등등으로 약을 올리고 도장이나 봉투도 한 나라보다 크게 해서 우위를 과시하는 등 사사건건 한나라를 골려주는 꼼수를 썼다고 하며, 효문제가 죽고 효경제가 들어서는 칠국의 난(七國之亂)이 일어나고 한나라와 흉노는 화친과 투쟁을 반복하는 가운데, 효무제(孝武帝)가 들어섰다.
 













▲ 미국의 조각가 죠오지 슈튜어트(1929-)가 제작한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초상.     © 매일종교신문


흉노는 남.북흉노로 분열하고,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가 기원후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이 북흉노를 공격하자 주류는 멸망하고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여 훈족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이 등장하게 된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서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고,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여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약해진 남흉노의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남흉노는 남하하여 대부분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 로마제국을 위협한 아틸라 휘하에 있던 훈제국의 판도(5세기).     © 매일종교신문


하지만 몽골은 흉노를 자신들의 선조로 간주하고, 몽골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이처럼 흉노는 동부 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사라졌지만, 북흉노 일파에서 서진한 흉노의 지도층이 우랄산맥을 넘어 초원지대에 정착했고, 약 2세기가 지나면서 이미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들에게 동화된 후 유럽에 돌풍을 몰고 온 민족이 훈족이라고 주장한다.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Attila,406-453)는 흑해 연안의 이란계 유목민족인 알란족을 시작으로 스키리족, 사르마트족, 게피타이족, 헤룰리족, 콰디족, 슬라브족, 동고트족 등을 정복하게 되며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틸라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일부 금석문에는 흉노 출신의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실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음을 근거로 재야사학자 및 소수의 역사학자들은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계속) (이치란 해동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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