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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실크로드기행⑲몽골시대의 실크로드-원나라에 이르러 실크로드 선상을 완전히 장악한 몽골제국



















▲ 내몽골 자치구 어얼둬쓰시(鄂尔多斯市, 악이다사시)에 있는 칭기즈칸 사당 앞에 선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몽골제국의 확장은 1207년부터 1368년까지이다. 몽골제국에 의해서 실크로드는 당나라 이후, 다시 안정을 찾고 재건설되는 듯했다. 몽골제국의 중심지는 카라코룸이었고, 칭기즈칸 일가의 근거지요 몽골제국의 수도로서 한동안 역할을 했던 초원제국의 중심부였다. 자연적인 지형과 초원은 몽골제국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초원과 강이었다. 칭기즈칸은 제국의 수도를 오르홍 강 주변에 정했다. 이 강은 셀렝게 강의 지류로서 강의 길이가 1천키로가 넘는 긴 강이다.
 













▲ 13세기 몽골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이 있던 오르홍 강 주변 지도.     © 매일종교신문


몽골제국의 창건자 칭기즈 칸(Genghis Khan1162~1227)은 1220년경에 이곳에 머물렀고, 중국공격을 위한 캠프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화림(和林)이라고 불렀다. 몽골제국의 제2대 칸인 오고타이 칸(1186~1241)은 수도를 카라코룸에 정하고 야율초재(耶律楚材1190~1244)에게 행정을 맡겨서 제국을 설계하도록 일임했는데, 야율초재는 금나라 출신으로 칭기즈칸이 신임했던 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다. 몽골군이 금의 변경을 함락시켰을 때, 그의 지식을 너무 아낀 나머지 칭기즈칸이 참모로 기용하였고, 야율초재는 항복하지 않는 성민(城民)을 모두 학살하는 제도를 폐지하게끔 건의해서 실현시켰고, 문화·교육의 진흥과 유학의 채택을 주장했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철저한 전쟁영웅이었지만,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피정복 지역의 행정가와 장수들을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통은 칭기즈칸 이후, 후계 칸들에 의해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 몽골제국의 창시자 칭기즈칸 초상화.     © 매일종교신문












▲ 칭기즈칸의 삼남으로 제2대 칸으로 등극한 오고타이 칸.     © 매일종교신문












▲ 요령성 금주에 있는 야율초재의 동상.     © 매일종교신문



오코타이(우구데이) 칸은 몽골의 황제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로 몽골 제국의 황위를 이어받았다. 칭기즈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코타이 칸은 거처를 카라코룸에 정하였고, 그가 가장 신임한 인물은 야율초재로서 아버지 칭기즈칸 때부터 통치의 조력자로 함께 해왔으며, 중국식 행정 조직을 구성하여 통치하는데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초원의 여러 부족을 제압하여 통일하고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칭기즈칸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를 치고 재빨리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 족이 세운 서하(西夏1032-1227)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티베트와 서요(1124~1218)를 어느 정도 복속시키고,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인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트란스옥시아나는 시르다라 강과 아무다라 강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대부분, 타지키스탄 대부분, 카자흐스탄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다 포함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칭기즈칸은 계속해서 서진해서 페르시아의 동쪽에 까지 이르렀다. 칭기즈칸은 키예프를 공격하고, 코카서스 일대까지 진군했다. 이처럼 칭기즈칸은 오직 공격을 늦추지 않고 중국남부만을 놔두고 몽골과 북 중국, 서하와 서요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것이다. 전쟁과 정복에 지칠 줄을 몰랐던 칭기즈칸도 한편 심리적으로는 불안했던지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칭기즈칸이 공격했던 중앙아시아는 이미 이슬람화 되어있던 지역이었다. 이슬람식 할랄 도축을 금지하고 몽골식 도축을 강요했으며, 특히 무슬림들이 양 도살을 비밀리에 조용히 하도록 했다. 음식에 있어서 특히 육식에 대해선 몽골식을 장려했던 것 같다. 유태인들의 할례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회족들이 몽골식 음식을 못 먹겠다고 하니까, 칭기즈칸은 너희들은 몽골의 노예들인데, 몽골식으로 먹으라고 강요했다고 하며, 각 민족의 종교적 신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적이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의 종교관은 무속과 텡그리즘(하늘)이었기에 타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간섭을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도교에는 관심이 있었고, 당대의 유명한 도사였던 구처기(丘處機1148∼1227)를 정복의 현장인 힌두쿠시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초청하여, 대담을 나눈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칭기즈칸은 1219년 서정(西征)중에 구처기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처기는 연로한 나이를 불구하고, 감히 칭기즈칸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던지 1220년 산동성을 출발, 북경을 경유해서 1221년 몽골의 케룰렌 강을 건너고 카라코룸을 지나서 알타이 산에 도착했다. 알타이 산맥은 러시아(서시베리아)와 몽골, 카자흐스탄, 중국에 접해 있는 산맥이다. ‘금의 산’을 의미하는 몽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몽골족은 알타이에서 연원되었다고 믿고 있다. 구처기는 계속해서 오늘날의 신장성 성도 우루무치와 천산산맥을 넘고 이닝에 도착했지만, 칭기즈칸은 이곳에 없었다. 구처기는 키리키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지나서, 탈라스 강에 이르렀고, 타시켄트와 사마르칸트에 도착, 아무다리야 강을 넘어서 발흐를 지나서 힌두쿠시 산맥 언저리에 있는 칭기즈칸의 막사에 드디어 도착, 알현하게 됐다고 한다. 같이 동행하면서 모든 과정을 가록했던 제자 이지상의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가 흥미진진하게 사건의 전말을 엮어주고 있다.
 













▲ 칭기즈칸이 만나기를 원했던 중국도교 전진교 도사 장춘자(구처기).     © 매일종교신문


구처기는 왕중양(王重陽1113∼1170)의 일곱 제자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북칠진의 한사람이었다. 중국도교는 오랜 역사가 있지만, 왕중양은 중국도교 전진파를 창시한 인물이다. 칭기즈칸이 전장에서 도사인 장춘자를 오도록 한 것은, 매우 관심이 가는 사건이다. 장춘자(구처기의 호)는 전진교 용문파(龍門派)의 개조(開祖)이기도 한데, 당대에 이름이 크게 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면서 승승장구했던 칭기즈칸도 인간인지라, 뭔가 마음속으로는 불안한 구석이 있었던지 아니면 죄의식에 시달렸던지 칭기즈칸의 내심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장춘자에게 뭔가 정신적인 것을 기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칭기즈칸은 도사 장춘자로부터 감화를 받았음은 틀림없는데, 장춘자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뭔가 세상의 물욕과 권력 같은 것은 초월한 인물이라는 것과, 자신을 조어(調御)하는 장부임을 알아채기는 했던 것 같다. 칭기즈칸은 장춘자에게 불로장생을 물었지만, 장춘자는 불로장생 같은 비결은 따로 없다고 충고하고 전진교의 교리를 설명했으며, 살생을 금하고 섭생을 권했다고 한다. 칭기즈칸도 장춘자의 대답에 만족했던지, 장춘진인(長春眞人)에게 몽골 제국의 점령지 어디서라도 전진교를 전도하고 보호하는 특혜를 베풀어 주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제자 이지상이 정리한 《장춘진인서유기》와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은 당시의 몽골고원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현재에 내려오고 있다. 장춘자는 서역에서 귀국 후, 연경(북경)에 있는 장춘궁(天眞館)에 살면서 폭넓게 대중의 신앙을 모으고, 그 땅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 장춘자의 스승인 왕중양의 신선 같은 모습.     © 매일종교신문












▲ 왕중양과 그의 수제자들인 북칠진(北七真).     © 매일종교신문


칭기즈칸은 구처기를 만나서 영감을 받고 나서도 정복을 계속하고, 야욕을 펼치다가 1227년에 죽었다. 칭기즈칸이 죽을 무렵, 몽골제국은 태평양 해안에서 카스피 해(海)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손아귀에 이미 넣었다. 로마제국이나 무슬림의 칼리파제국보다도 두 배나 큰 영토였다. 칭기즈칸은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3남 오코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서 비밀리에 비밀의 장소에 묻혔다고 하는데, 지금도 칭기즈칸의 실제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있는 중이다. 오코타이가 1229년 쿠릴타이(集會:合議制度)에서 정식으로 선출되기 까지는 막내인 툴루이가 섭정했다. 오코타이는 등극하자마자 러시아와 볼가 강 지역에 군대를 보냈고, 만주지역을 공격했다. 또한 중국을 공략하기 시작해서 1234년에 중국전역을 거의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오코타이는 1241년에 죽고, 그의 장남인 귀의크(구육, 1206~1248)가 제 3대 칸으로 등극했고, 귀의크는 아버지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한동안 배척했던 아버지가 등용했던 관료들을 그대로 복직시키고, 위구르(현재 신장성자치구) 나이만(10∼13세기 알타이산맥과 이르티슈 강 사이의 초원에서 유목한 투르크계 유목부족 및 그들이 세운 나라)과 중앙아시아의 관료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중국인(한족) 장군들을 좋아하게 됐다. 그는 고려와 남송을 공격하고 이라크를 공격했다. 그는 1248년에 죽게 되고, 칭기즈칸의 막내인 툴루이의 아들 뭉케가 칸으로 등극했다. 뭉케 칸(1209~1259)은 몽골 제국의 제4대 칸(재위:1251~1259)이다. 그의 형제는 쿠빌라이, 아리크 부케, 훌라구 등이었다.
 
뭉케 칸은 선조 칸들의 법을 철저하게 따르고, 금주를 하면서 각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고, 외국 상인들이 머물면서 무역 활동을 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고, 불교사원 이슬람 모스크와 교회건물을 세우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카라코룸에는 중국식, 유럽식과 페르시아 식의 건축물이 들어서고, 국제도시다운 면모로 그 위용이 대단했다고 이곳을 방문했던 유럽의 여행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 있는 에르덴주 사원은 1585년에 건립된 것이다. 옛 사원 터에 할하 몽골 통치자가 그의 손자인 자나바자르(1635∼1723 티벳-몽골 서열 3위)를 위해서 다시 세운 사원이다.
 
몽케 칸은 제국이 재정적으로 부유해지고, 행정체제가 안정되자, 1253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제국의 국경을 확장하기로 결의했고, 1258년에는 중동과 남중국을 공략할 것을 결의했다. 뭉케 칸은 자신의 형제들인 훌라구(1218∼1265)를 페르시아의 군사 및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 일 칸국을 건설한 훌라구 칸.     © 매일종교신문


훌라구 칸은 중동원정을 통해서, 1255년 일 칸국을 건설했다. 현재의 이란, 이라크에 걸쳐 있던 나라였다.
 













▲ 훌라구 칸이 정복하여 세웠던 중동지역의 일 칸국의 영토(존속1256~1335).     © 매일종교신문


몽골제국은 뭉케 칸의 죽음을 계기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뭉케 칸 사후에 몽골제국은 혼란과 내분이 휩싸이게 되었다. 뭉케 칸이 죽기 전까지의 몽골제국은 아시아 전 지역을 거의 제국의 판도아래, 영토화 시켰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이 제국을 창건한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후계를 둘러
 













▲ 몽케 칸(재위: 1251-59) 사후 직후의 몽골제국판도.     © 매일종교신문


싼 내분과 암투, 친족 간의 골육상쟁이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쿠빌라이 칸(1215∼1294)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몽골제국의 제 5대 칸이 되었지만, 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간단치가 않았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의 넷째 아들이며 뭉케 칸의 동생이었다. 1251년부터 형인 뭉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맡겼고, 이때 뭉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남중국을 정벌토록하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을 주었다.
 
쿠빌라이는 시안 지역을 영지로 받았고, 그는 이 지역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고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는 기록이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雲南省)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침공,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고, 1253년 가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했다. 정복 직후인 1254년 초 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 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감지하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 1257년 뭉케 칸의 지휘 아래 출정한 남송 공략을 준비하던 중, 1259년 뭉케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
 













▲ 몽골제국의 제 5대 칸이며, 원 세조가 된 쿠빌라이 칸.     © 매일종교신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뭉케 칸의 전사 소식과 함께, 아리크 부케가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송과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1260년 4월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에 도착, 그의 지지 세력들에 의한 임의로 개최한 쿠릴타이(Kuriltai, 大會議)에서 뭉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한편, 아리크 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였다. 후계 칸이 누구냐는 1264년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와의 전투에서 결판이 나고 말았다. 쿠빌라이의 승리로 인하여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거절하고 끝까지 항거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고, 쿠빌라이 칸의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혼자만의 힘이 아닌 쿠빌라이 세력의 승리였다. 카라코룸에서 수도를 대도(베이징)로 옮기고,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했다. 중국식 국호를 택하고,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을 정복하였다. 또한 버마·일본 등지를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인종을 실력 위주로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기원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또 한편, 대칸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고려 제24대왕 재위: 1259-1274)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忠烈王,1236~1308,재위 1274~1308)을 사위로 맞았다. 충렬왕은 원 황실과 처음으로 통혼한 고려왕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었는데, 몽골 침략 후 충렬왕의 부친인 원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원에 통혼을 요청하였고, 충렬왕은 연경에 들어가 세조의 딸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와 혼인하였다. 충렬왕 이후로 고려왕의 묘호는 조(祖)나 종(宗)과 묘호(廟號)를 사용하지 못하고, 충(忠)이라는 돌림자를 사용해야 했다. 원나라는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 쿠빌라이 칸이 마르코 폴로의 가족에게 재정적 선물을 주는 그림.     © 매일종교신문












▲ 위구르족 출신인 라빤 바사우마의 유럽 그리스도 국가 순례행로.     © 매일종교신문


몽골제국은 원나라에 이르러서 실크로드 선상을 완전히 장악하고 신질서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 이후, 이슬람의 장악으로 인하여 실크로드가 무질서해지고, 해상실크로드가 부상함에 따라서 다소 막혔던 실크로드는 몽골제국과 원나라의 신질서학립으로 실크로드는 다시 재건되는 듯했다. 이런 과정에서 원대의 네스트리우스교(景敎)의 수도사였던 라반 바사우마(Rabban Bar Sauma?~1294)가 사절 신분으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을 순례하고 친서를 전달하는 사자(使者)의 역할을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치란 해동 세계 불교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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