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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2006년 만해축전 자료 수상자론 -이치란 박사

다운받기(2006만해축전PDF) 



호법보살로서의 문화 대통령
― 남바린 엥흐바야르론―



이치란(세계불교연구원장)


 


 


 



1. 들어가는 말



몽골(Mongolia)의 관문인 칭기즈칸 국제공항은 지금 분주하기 그지없
는 국제공항으로 변모하고 있다. 90년대 초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바뀐 뒤 러시아를 통해서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시베리아의 이루쿠츠크에서 열차편으로 브리야트 공화국
수도 울란우데를 거쳐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들어갔다. 당시 울란바
토르 시내는 자동차도 없는 한가로운 시가지였다. 함보 라마인 담마자브
총무원장 스님이 러시아산 군용 지프차를 몰고 울란바토르 역으로 우리
일행을 환영하러 나온 것이 엊그제 같다. 이 지프차만이 신나게 달리던
당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중국 베이징을 거쳐서 항공편으로 몽골에 들어갔다. 95년부터는 서울-울란바토르 간 직항노선이 개설되었다.



처음에 상하이 상공을 통과할 때는 5시간 이상이, 나중에 베이징 상공을
통과하면서는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지금은 인천에서 출발하여 3
시간이면 몽골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내릴 수 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
도 국제공항은 75여 년 간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한 구소련처럼 제도적 잔
재와 공산사회주의 특유의 관료주의가 채 가시지 않은 을씨년스런 모습
이었다. 그러나 2006년 유일한 국제공항을 칭기즈칸 국제공항으로 개칭
하고, 몽골제국 탄생 800주년을 맞아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며 손님맞이
에 분주하다.



몽골의 변화는 칭기즈칸 국제공항에서 감지할 수 있다. 상전벽해란 이
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공항뿐만이 아니라 울란바토르 시내 그리고 초
원지대까지 몽골의 개방과 변화와 개혁의 급류를 타고 있음을 피부로 느
낄 수 있다.



몽골은 구소련의 공산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자 발 빠르게 정체(政體)
변화를 시도했다. 내각과 대통령제를 절충한 이원집정부제 형태의 정치
체제를 갖추고, 민주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과 국회를 국민이 직접 선출
하는 정치체제를 택했다. 몽골은 정치, 경제, 체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유무역개방체제로 즉각 전
환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몽골의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
다.



일찍이 유라시아를 포괄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하지만 14세기
중반부터 계속된 명₩청의 지배와 세계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로의 변신,
그리고 1988년 시작된 몽골판 페레스트로이카인 신칠렐(Shinechile) 정책
을 채택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변신 등을 겪었다.



몽골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몽골사회
에 불어 닥친 최근의 변화를 꿋꿋이 온몸으로 바쳐온 인물을 손꼽아 보라
고 한다면, 필자는 남바린 엥흐바야르 현직 몽골 대통령을 지목할 것이
다. 그만큼 그는 신칠렐 이후 몽골 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인
물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논하려는 만해대상 포교부문 수상자론의 대상
인물이기도 하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만해대상(포교부문)을 수상하게 된 직접
적인 공적은 그의 불교적 업적과 국제포교활동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불
교적 측면에서만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세 분야에서 탁월한 역
량을 발휘하였는데, 정치와 문학과 불교가 그것이다. 만해대상 수상자로
서 그의 진면목과 공적을 설명하는 데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많
이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소하고 먼 이국의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선 몽골의 불교에 대해 간단히 살핀 다음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구현
된 그의 삶과 정신, 그리고 공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몽골불교와 보살사상 구현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 특히 몽골은 샤머니즘과는 뗄 수 없는 숙명적
운명을 타고난 듯하다. 지금도 몽골은 샤머니즘의 종주국 같은 느낌을
받는다. 13세기 티베트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 샤머니즘은 몽골의 부족국
가와 몽골제국의 주요 종교였다. 샤먼은 부족국가나 제국의 왕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티베트 불교가 수용되면서 이들의 역할은 다소 약해졌지만
여전히 몽골의 문화와 생활에 주된 요소의 하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
이다.



몽골은 옛날부터 청명한 푸른 하늘을 숭배해 왔다. 그러면서 샤머니즘
을 신봉하고 무속행위 또한 만연했다. 불교가 수용되면서 샤먼의 종교적
의례와 자연치유 행위를 라마가 대체하자 샤먼들과 라마와의 투쟁이 빈
번해졌다.



호법보살로서의 문화 대통령 11



샤머니즘은 불교나 기독교처럼 누가 창시한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
으로 생겨난 원시 종교이다. 샤머니즘은 신성한 경전이나 교리적 체계가
없다. 또 어떤 일정한 사원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샤머니즘의 원류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샤머니즘이 인간과 더불어
발생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물신숭배(物神崇拜), 토템신앙과 정령주의(精靈主義)와 다를 바 없다고도 말한다.



지금도 순록을 치는 차탄이라는 오지를 포함하여 북몽골과 서몽골 지
역 몽골인들은 샤머니즘을 신봉하고, 샤먼들은 세습된 샤머니즘의 의식
과 매직, 자연숭배, 고행과 자연치유 행위를 하고 있다. 몽골의 샤머니즘
의례인 굿이나 굿에 사용되는 무구(巫具)들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우리
와 비슷한 무속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당도 색깔무와 세습무, 강
신무가 있는데 과거 우리의 무속문화와 너무 흡사해서 뿌리가 같다는 것
을 이내 알 수 있다. 또 오보라고 하는 성황당도 우리의 성황당과 똑같다.
이런 샤머니즘 문화를 뚫고 들어 간 것이 티베트 불교이다. 그 이전에는
중국과 몽골의 변경을 통해서 간헐적으로 중국불교가 유입되지 않은 것
은 아니지만 정착될 정도는 아니었다.



티베트 불교는 바즈라 야나(金剛乘) 불교라고도 하는데, 고통으로부터
의 해탈과 환생이 목적이다. 몽골에 티베트 불교가 전래된 것은 13세기
말 쿠빌라이칸 시대이다. 쿠빌라이칸 이전인 칭기즈칸 시대에 이미 티베
트 불교가 몽골제국에 알려졌지만, 공식적인 전래는 쿠빌라이칸이 티베
트의 고승인 파그바(Pagba)를 종교적 대표로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14세
기 말이 되면서 몽골 전역에 빠른 속도로 사원이 건립되었고, 수천 명의
남자들이 라마로서 일생을 살아가기를 서원했다. 당시 남성 인구의 7분
의 1이 가사를 수하고 라마가 되었다고 하니 불교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
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20세기까지 몽골불교는 지속적으로 발전했으며
몽골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불교는 몽골에서 종교적 역할과
민족지성으로서 삶을 지배하는 역할을 단단히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서 몽골불교는 침체의 길을 걸었고, 1990
년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신헌법으로 보장될 때까지는 단 하나의 관제사
원인 간단사만 존속케 하고 소수의 라마들만 인정했었다. 그렇지만 종교
의 자유가 보장된 지금 사원은 3백여 개소, 라마는 2천여 명에 이를 정도
로 몽골불교는 급속하게 복원되고 있다. 1996년 10월, 서울의 조계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울란바토르 시내에 위치한 간단사(Gandan Temple)에
서는 몽골불교의 복원을 상징하는 무게 60톤, 높이 25미터나 되는 관세음
보살상을 법당 내에 봉안했다. 이 관세음보살상 조성 건립추진위원장이
바로 지금의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를 몽골에 초청하는 작업을 주도한 것 또한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이었다. 그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몽골로 귀국할 때,
인도의 다람살라에 들러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기도 했던 인연이 있었
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이 자유화되자마자 몽골을 방문하여 불교 부흥에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 울란바토르에 달라이 라마
몽골 사무실을 개원하고 그의 정신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본토를
떠나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몽
골에서도 역시 정신적 지도자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존재이다.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은 티베트를 포함하여 바즈라 야나(金剛乘) 권인
몽골 브리야트, 투바, 칼믹, 인도, 라닥, 부탄, 시킴, 네팔, 대만의 밀교와
중국의 신강성과 내몽골까지 미친다. 판첸 라마를 내세우는 중국과는 정
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 문제로 항상 긴장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몽골은
확실하게 달라이 라마의 정신적 영향 아래에 있다. 몽골에서는 알탄칸
황제 시대부터 바즈라 야나의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다음으로 성직의
제 3서열인 보그도(Bogdo)란 지위를 몽골에 인정하여 몽골에서 계속 환
생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몽골은 아직 단일 승단으로서의 종단권력체계는 확립되지 않은 상태
이지만, 우선 몽골승단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종정 지위의 함보 라마 체이
잠스토나, 총무원장 격인 함보 라마 담마자브는 70년대 스리랑카에서 남
방 상좌부 수업과 인도 다람살라의 남걀 사원에서 달라이 라마의 지도를
직접 받은 제자들이다. 이 두 분은 몽골의 국사와 같은 존재로서 사실상
몽골불교를 이끌어 가고 있는 쌍두마차이다. 출가 승려로서는 이 두 분
이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서 1세대 인도 유학파라고 할 수 있다. 90년 이
후에는 많은 라마들이 동남아시아나 인도나 미국 그리고 다른 아시아의
불교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재가에서는 현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 국
회의원, 학자 등 각계각층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는 90년
이후 몽골을 다섯 차례나 방문하였다. 그만큼 달라이 라마는 몽골을 각
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와 승려들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항상 정
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몽골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 몽골의
도시들에는 사원이 즐비하고 전 인구 중 남성의 3분의 1이 라마였던 때도
있었다. 몽골이 공산화되기 전의 이헤 후레(Yihe Huree)라는 대사원에는
바즈라 야나의 성직(聖職)으로 정신적 지도자로서는 서열 3위의 생불(生
佛) 보그도 게겐(Bogdo Gegen)으로 알려진 젭순담바 쿠투쿠(Jebtsundamaba Khutukhu)가 주석하고 있었다. 이 대사원과 또 다른 대사원인 우
르가(Urga)의 양대 사원에는 각각 1만 3천과 7천의 라마들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20년대만 하더라도 11만 명의 라마가 있었고, 이는 당시 남성 인구의
3분의1 수준이다. 칭기즈칸 이후 몽골제국의 지배층을 형성했던 귀족들
의 후예들은 신분상의 몰락으로 상당수가 라마가 되어 사원에서 생활했
으며 연고가 있는 속세의 일가친척까지 사원에서 대물림하고 있었다. 당
시 인구가 1백만 명인데 전 인구의 3분의 1인 30만 명이 사원에서 기식했
다고 하니 상상을 뛰어넘는다. 청나라에서 독립한 후에는 보그도는 보그
도칸(神政의 왕의 지위)으로 옹립되어 10년간 섭정한 바 있다. 이 무렵 사
회주의의 싹이 트기 시작했는데, 교권(敎權)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는 조
짐이 보이고 사원과 라마들의 나태와 무능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가 커지
기 시작한다.



1921년 민중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적 신앙을 규
제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몽골의 문화와 생활에 깊숙이 뿌리 박혔던
사원과 라마들은 쉽게 전향을 할 수 없었다. 10년 정도 지난 1930년대의
몽골 사회주의 정부는 7백 개의 사원을 파괴하고 수많은 라마들로부터
가사를 빼앗고 그들을 환속시켰다. 그래도 사원과 라마를 고집하던 1만
1천명의 라마들을 처형시켰다.



지금도 당시 희생자들의 후예들은 한을 안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보드
카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인지 몽골의 라마들은 보드
카 몇 잔과 아이릭이라는 마유주(馬乳酒) 몇 사발 들이키는 것을 흉이라
고 생각한다든지 파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까지도 이런 애
환을 이해하여 몽골 라마들의 계율문제에 대해 관대하며 티베트 전통의
독신 라마주의를 몽골에서만큼은 대처 라마로 양해했다는 후문이다. 그
러나 가능하면 새로 입문하는 젊은 세대들의 독신 수행을 강조했다고 한
다. 몽골불교는 인구가 적기 때문에 라마의 독신유무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을 뿐더러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국민 전체가 관대한 편이다. 그렇지만
최근 대통령은 사석에서 몽골 승단 지도부에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는 윤
리적 청정성을 회복하고 과음을 삼가고 불교 중흥에 정진해 줄 것을 당부
했다는 전언이다.



한때 보그드칸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처럼 몽골 국민과 교단의 수장
역할을 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그의 하궁(夏宮)에는 별궁과 사원
이 함께 있고, 그와 왕비의 영정이 보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몽골불교
미술 조각 등 국보급 문화재가 가득 들어차 있는 보고이다.
그리고 몽골 국립 도서관과 국립 몽골 대학교에는 2백만 권이나 되는
옛 전적(典籍)이 보관되어 있다. 이 전적은 거의가 옛 몽골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몽골은 지금 말은 몽골어이지만, 문자는 러시아처럼 키릴문자
를 차용하고 있다. 내몽골은 아직도 이 몽골고문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은 문화부 장관 재직 시절, 초등학교 때
부터 몽골문자를 학습하도록 하여 20∼30년 후에는 다시 원상 복귀한다
는 플랜을 세우고 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신심과 몽골의 전통문화와
불교사원 복원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그는 1990년부터 1992년 국회의
원에 당선될 때까지 몽골 정부 문화예술발전위원회 수석부회장으로 재
직하면서 문화₩예술₩종교 전반에 대한 진흥책을 수립한 바 있다. 그리
고 문학도이지만 몽골의 현실에서 문화₩예술₩종교의 진흥을 꾀하려면
현실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동시에 문화부장관을 맡았고, 정부를 대표하여 간단
사의 관세음보살상 조성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국가적인 대작불사를
성취했다.
그는 불교의 중흥이 바로 국가발전이라는 신념을 확신했고, 정치₩경
제₩문화 전반에 걸쳐서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인 자리이타와 하화중생의
박티(헌신) 정신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호법보살인 것이다. 그는 정치적
제스처나 쇼맨쉽이 아니라 진실로 보살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남바린 엥
흐바야르 대통령은 아버지 고향인 아랑가에 대불(大佛)을 조성하려고 서
원을 세우고 지금 추진 중이다.

3. 외국 유학과 세계불교의 재인식



이러한 그의 불교적 신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의외로 그의 불
교관은 해외 유학 시절 경험에 더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
론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몽골에서 보내면서 불교를 접하지 않은 것은 아
니었지만, 불교가 피부에 와 닿는 직접적인 계기는 영국 유학시절이었
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1958년 울란바토르의 중류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울란바토르의 특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모스크바로 유학
을 간다. 그는 명문 모스크바 대학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하였으며,
1980년에 귀국하여 몽골작가협회에서 번역 편집과 사무국장직을 수행하
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비록 울란바토르라는 도시에서 출생했지만, 아
버지는 몽골의 서북 지역인 아랑가 출신이다. 선조들은 라마였으며, 할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 라마였다. 또한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사원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서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형성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모님들은 간단사의 성실한 신도로 그는 어
릴 때부터 몽골의 유일한 사원이었던 간단사에서 종교적 신앙심을 키워
왔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하고 있다. 비록 관제불교이고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간단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불교의 위대성은 어느 정
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간단사에서 1930년대 이전의 몽골불교의 영화를 은밀히 들을 수
있었다. 불교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불교도가 되게 한 것은 그의 주변 환경이었다. 불교 박해로 1만 1천 명의
라마가 처형된 후에도 여전히 많은 전직 라마들이 마을에서 은밀히 티베
트와 몽골의 장경을 읽고 만트라를 외우는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했으나 불교 신앙의 실상을 몸소 체험했고 그런 분
위기에서 그는 성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관을 바꿀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성실한 불교도라고 할 정도였을까?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일찍이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하면서 러시아를
통해서 서구문학에 눈을 떴다. 러시아 문학뿐 아니라 서구문학에 심취한
그는 서구 문학 전반에 걸쳐 독서 범위를 넓혔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문
학과 언어학을 전공하면서도 구미문학과 영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1980년대 중반 영국 중부 지역에 위치한 리즈대
학에서 영문학과 영어를 공부하면서 제2의 유학기를 보내게 된다. 이곳
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영국은 국교가 성공회이지
만, 불교가 학문적 측면에서나 수행 측면에서나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나라이다. 그는 영국에서 일종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영국의 도시들
은 공산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와는 전혀 달랐다. 불교
라는 종교가 이처럼 영국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는지 그는 미처 몰랐다.
그리고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이곳 영국에서는 몽골에
서보다도 더 존경받는 존재였다. 물론 몽골에 있을 때도 어렴풋이 달라
이 라마에 대한 이미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강렬하게 그의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영국은 세계불교의 전시장과 같은 나라이다. 동남아 상좌부 불교, 일본
의 선불교와 티베트의 바즈라 야나가 들어와 있다. 불교 수련장도 대소 5
백여 곳이나 된다. 8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수련장이 약 3백여 군데가 있
었고, 학문적으로는 일찍이 19세기부터 유럽의 3대 불교학파의 하나였던
앵글로 저먼학파가 옥스브리지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이면
학문적으로도 영국의 불교는 세계적인 선진국이었다. 불교학에서 문헌
학적으로는 일본이 앞섰다고 하지만, 앵글로 저먼학파(영국, 독일), 프랑
코 벨기에학파(프랑스, 벨지움)와 레닌그라드학파(러시아)를 무시할 수
없다. 이미 19세기에 성립된 학파들이다. 19세기 말에 결성된 팔리성전
협회에 의하여 팔리 삼장은 영역된 지가 이미 오래였다. 1980년 중반이
라면 수많은 불서가 영어로 저술되고 번역되었을 때이다. 남바린 엥흐바
야르가 이런 영국불교나 서구불교의 흐름을 놓쳤을 리가 없다. 당시 영
국의 많은 대학들은 이미 불교담당 교수가 한두 명은 다 있을 무렵이다.
그는 세계불교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바즈라
야나를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국 생활은 그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사
회주의의 이론을 제공하고 자본론을 썼던 칼 마르크스의 런던 생활을 생
각하면서, 칼 마르크스가 읽었던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장서들을
보고, 또한 귀족들의 무덤과는 대조적으로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의 평지
한쪽에 위치한 그의 무덤을 가 보았고, 그의 무덤 비석에는 항상 꽃다발
이 바쳐져 있음을 목격하기도 하면서 그는 동서냉전과 이념의 갈등을 그
리고 세계평화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그는 만감
이 교차하는 한 젊은 지식인으로서, 문학도로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념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을 것이고, 종교와 철학과 사상을 사색
하면서 정치₩경제 현실 앞에 나약해지는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고서
는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대영제국의 후예들이 왜 불교에 심취했는가 생
각해 봤다. 처음 몇 달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조국 몽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고 그는 고백한 바 있다.
그가 전공했던 세계 문학사에서 몽골은 존재가 없었고, 역사에서도 몽골
제국과 칭기즈칸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몽골제국과 칸 뒤에는 바즈
라 야나 불교가 있었음을 그는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하지만 영국에서
만난 불교가 그렇게 강한 충격을 그의 인생에 던질 줄은 그도 몰랐다. 러
시아에서는 러시아 정교가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다만 문학에
몰두하는 순수한 문학청년이었을 뿐이었다. 영국에 갈 때만 해도 영문학
을 공부하러 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후예들이 심취해 있는
불교를 목격했을 때, 그의 인생 한쪽에 그저 놓여 있을 뿐이었던 바즈라
야나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는 말한다. 당시 영국에서
의 경험이 불교를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그는 칭기즈칸과 라마이즘이라는 단어에 몰두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정치₩역사₩경제의 중심국가 가운데 하나인
대영제국의 후예들의 태도를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너무나 자신감에 찬
그들이 아닌가. 그가 생각했던 세계관, 문학관, 종교관, 인생관은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그는 몇 달을 고뇌했다. 그러던 즈음 리버풀 지역에 있는
티베트 수도원인 만쥬스리와 삼일 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바즈
라 야나에 몰입하여 만트라를 외우고 박티 요가를 하면서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나 진지한 대영제국의 후예들을 다시 한 번 접하게 되
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대영제국의 후예들과 함께 7일 간의 용맹정진에
참가했다. 그리고 비로소 바즈라 야나의 실상을 체험하게 됐다. 그 이전
까지의 불교는 단순한 신앙이었을 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수행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음을 어느 날 아침 문득 전율처럼 느끼게 되었다고 한
다. 그리고 서구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념이나 사상보다는 인간애(人間
愛)와 영적(靈的) 갈증에 목이 말라 있음을 그는 이해하게 되었다.
티베트와 몽골이 아닌 영국의 티베트 사원에서 불교를 새롭게 인식하
게 된 자신을 생각하면서, 조국 몽골의 역사와 불교와 몽골의 문화와 몽
골의 현실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단전으로부터 뻗쳐오르는 기
운을 감지했다고 그는 회상하고 있다. 몽골로 돌아가자. 대몽골 제국이
었던 말과 양이 풀을 뜯는 초원으로 가자. 그의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고
동소리에 그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고 한다.

이처럼 몽골 불교만이 아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
고 부흥하려는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영감과 신념의 원천은 영국
유학 시절에 정립됐다. 그리고 현실정치에 뛰어들게 된 동기와 웅지가
이 때 싹텄다. 영국이라는 서구세계에 전파되어 활발하게 신앙되고 실천
되는 세계불교의 실상을 접하면서 그는 비로소 인생의 한쪽에 조용히 놓
여 있기만 하던 바즈라 야나를 자신과 자신이 처한 조국의 현실 앞으로
끌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몽골불교의 부흥과 그에
바탕한 몽골문화 역사정신의 복원이라는 신념으로 구체화되었다.



4. 호법보살로서의 국제 정치가
사실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정치적 활동은 만해대상(포교부문)
을 수상하는 수상자를 논하는 글에는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으로서 몽골불교 부흥과 복원은 물론 세계불교와의 관련 속
에서 불법홍포와 교류에 적극적이고 보살정신에 입각하여 정치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활동을 언급하지 않는 것 또한 편견일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정치 활동은 그의 불교적 신념과도 긴밀하게 연관되
어 있다.



2005년 6월 20일은 남바린 엥흐바야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일
것이다. 몽골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이었으며, 그의 정치적₩문화적 신념
이 몽골사회의 인정을 받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개표는 다음날 오
전까지 계속되었다.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된 그가 가장 먼
저 찾은 곳은 간단사였다. 마침 이 날은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가 바로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된 관음전 앞 광장에서 봉행되고 있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관세음보살상에 경배드리
고 몽골 불자들과 국민들에게 당선소감을 피력했다. 필자도 마침 그 행
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 본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거의
70%에 육박하는 득표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몽골 국민들에게 그는 젊
은 지도자로서 몽골의 장래를 맡겨도 될 만한 믿음직한 새 기수로 받아들
여지고 있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영국 유학에서 귀국하자마자 몽골인민혁명당에
입당했다. 영국에서의 경험이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그의 결심을 굳혔
다. 웅지를 펴기 위해서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본업이 번역이요 문
학이었지만, 그는 정치를 택하여 변신을 시도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몽골 역시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유시장 경제체제로
전환하고 신헌법에 의하여 92년 총선을 실시했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이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고, 동시에 문화부장관으로 발탁
됐다. 그의 역량이 인정된 것이었다. 그는 임기 동안 몽골 문화 부흥에 대
한 밑그림을 그리고 초석을 놓는 데 성공했다. 파괴된 사원을 복원하고
박물관을 비롯하여 유적₩유물 보호에 대한 입법을 추진하고, 문화₩예
술 ₩ 종 교 ₩ 전 통 전반의 계승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했다.
그는 문화부장관이 되기 전에 이미 몽골의 문화와 역사의 우수성을 자
각하고 세계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몽골의 천 가지 문화유산,
무너지는 위험을 되돌아본다》는 저서를 통해서 역설한 바 있다. 몽골의
전통과 역사와 문화를 보호하고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몽골문예부흥’을 주장했다. 기성세대의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과감히 현실참여를 선택했고, 몽골 르네상스 운동의 신세대 지도자
로 부각되었다. 그의 문예부흥운동은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고 신세
대들을 중심으로 세력화되면서 몽골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찾는 자각운
동으로 승화되었다.



문화부 장관직에 있는 동안, 그는 간단사의 관세음보살상 조성을 비롯
하여 옛 사원의 복원과 과거 고승들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했
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불교계 인사들을 초청하고, 예술 활동
과 미술 전시회 등을 개최하여 문화교류의 폭을 넓혔다. 1993년에 개최
한 사리친견봉안법회는 몽골 국민들에게 불심을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
했다. 1996년의 관세음보살상 조성 낙성식에는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세
계의 여러 불교 고승들과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대법회를 개최하고, 몽골
은 불심으로 다시 재건돼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몽골인민혁명당이 96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소수
당으로 전락하면서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그의 정치적 역량을 시험할 기
회를 맞이하게 된다. 비록 소수당으로 전락한 야당의 대표이기는 했지
만, 9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소속 정당 후보를 압도적 표 차이로 대통령
으로 당선시키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그
는 후일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총리 재임 시절 그는 많은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시키고, 몽골 경제의 성장을 견인했다. 토지소유의 사유화 정책을
실시하고, 국제무역 및 외국인 투자유치에 과감한 특혜를 부여하고, 국민
들에게는 공정한 분배와 정치경제적 기회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
다.
몽골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이 그렇듯이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
역시 한국을 정치 경제의 발전 모델 국가로 생각한다. 경제실리주의 노
선을 택한 것이다.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은 한국과의 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몽-한 정상회담을 비롯해서 양 정부의 자원 관계
부처 연례회의를 갖는 등 경제협력과 자원개발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
고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유일한 한국사원인 고려사가 있다. 고려사의 원
력으로 울란바토르 남쪽 국제평화공원에 2005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
사에 맞춰 조성, 봉안한 23m 높이의 노천대불은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
령을 비롯한 몽골 지도층과 몽골 불교계의 협력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이날 봉축행사에서 엥흐바야르 대통령은 몽-한 불교문화교류와 후원에
감사하고 계속해서 몽골 불교문화 창달에 한국의 지원과 협력을 바라며,
앞으로 몽골불교가 진흥되고 많은 사원이 복원되어 몽골이 부처님의 정
법이 구현되는 불국토가 되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남바린 엥흐바야르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시장경제에 의한 개방주의
를 신봉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정치철학은 대승불교사상에 입각한
보살정신의 구현에 있다. 인도의 아쇼카 대왕처럼 호법(護法)의 왕으로
서 전법(傳法)과 선정을 몽골과 전 인류에게 베푸는 것이 그의 정치이상
이요 철학이다. 부처님과 역대 고승들의 가르침을 본받고 이를 몽골 국
민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평화운동으로 구현하려는
것이 그의 정치철학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몽골 발전 프로젝트는 몽골 국민들을 21세기 문화민족으로서 정
예화하는 것이다. 그는 몽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새로운 몽골 정신’즉
칭기즈칸의 영웅적 위업과 몽골제국의 역사와 초원과 말 그리고 자원 등
이 하나로 용해된‘몽골인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이 자
각한 지도자이다. 칭기즈칸을 내세우고 전통문화와 불교의 진흥을 모색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몽골 혼’을 되찾고 슬로
건화하여 국민을 영도하겠다는 것이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정치
적 신념이다. 그가 내세우는 새로운 몽골 정신은 대승불교의 보살정신과
일찍이 세계적인 정보네트워크를 건설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재도약이다.
그렇기에 그의 정치철학은 상생의 철학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만해대상
(포교부문)을 수락하는 수상소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해대상 가운데‘국제포교대상’을 저에게 수여하고자 결정하고 초청
하여 주신 데 대하여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만해재단과 심사
위원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의 후원과 우호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평화를 증진시키는 영예로운 지도자들 가운데 저를 선택하여 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몽골의 불교문화와 역사적
전통 복원에 도움을 주려는 저의 소박한 노력과 인간의 마음에 공명하는
우호와 자비정신을 사회생활에 구현하는 불교사상을 펴는 데 노력하며 이일을 실천하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로 하여금 만해재단에서 지구촌의 안정과 모든 존재들에 대한 웰빙을
향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는 데 대하여 지원하도록 한 것은 저에게도 하나
의 특권이며, 이로써 저는 아주 기쁘게 만해재단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만해재단의 모든 활동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저는 관용, 우호와 자비라는 불교의 보편적 가치는 국가와 민족 간에 상
호이해와 일치를 위할 뿐 아니라,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도 존경과 우정의
연결이 되는 원천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항상 저의 삶과 활동의 신념
이며 정신으로 존재해 왔으며, 이것은 앞으로도 저에게 계속 유지될 것으
로 믿습니다.



이처럼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은 만해대상 수상소감에서 몽골의
불교문화와 역사적 전통의 회복, 그리고 불교정신에 바탕한 인류애와 자
비정신의 사회적 구현을 자신의 신념이자 소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남바
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정신적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히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몽골이라는 국가
의 나아갈 바를 불교문화와 역사적 전통의 복원에서, 그리고 불교정신에
바탕한 인류애와 자비정신의 사회적 구현에서 찾는 정신적 지도자의 면
모마저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만해대상(포교부문)의 수상자로 결정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5. 문화 대통령으로서의 국제 활동과 저술활동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의 활동영역은 몽골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
다. 그리고 그의 활동이 몽골 국내에 한정된 것이었다면 그다지 주목받
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미 동서 냉전 시절에 동서 세계의 중심지였
던 구소련의 모스크바와 영국에서 수학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경험을 가
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몽골 사회의 중심부에 진입하면서 그의
활동영역을 몽골 국내만이 아닌 국제사회로까지 넓히는 데 중요하게 작
용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30대에 시야를 몽골 초원에서 세계무대로 확대한 세계인이
었다. 유학 시절을 통해서 그는 몽골은 물론이지만, 구소련 외에도 더 넓
은 인간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몽골이나 구소련
의 위성국가들만이 이 지구를 움직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구소련의 모스크바와 영국 유학에서 많
은 것을 배우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신사로서의 교양과 세련미를
갖춰 나갔다.
또 그는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 약 5년간 몽골의 전통과 역사와 문화
와 불교에 심취하면서 연구하고 많은 글을 썼다. 몽골을 재발견하고자
몽골 전역을 누비며 유적을 답사하고 유물들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1995년 이래 몽골국립박물관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칭기즈칸을 위시한 역대 칸들과 고승들을 연구하고 하다 못해 몽골의 가
축과 식물과 꽃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식의 폭과 깊이를 증가시켜 갔다.
그는 이 무렵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논설들을 썼으며, 번역서를 출간
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몽골의 르네상스 운동을 주도하였으
며 큰 반향과 호응을 받았다.




몽골 국립도서관과 국립 몽골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2백만 권의 전적
을 보고 그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몽골이 한때 세계를 재패했던
대제국이었으며 유목국가이면서 동시에 문화대국이었음을 다시 깨달았
다. 이렇게 몽골의 역사와 불교에 기반한 문화전통을 재인식하면서 그의
활동영역은 점차 넓어져 갔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국제활동은 그 폭이 더욱 넓어졌다. 몽골-인도 친
선협회회장을 맡았고, 각종 국제세미나에 참석하고 외빈을 접견하고 여
러 나라와의 교류를 갖는 데 앞장섰다. 또 몽골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불교 기구인 아시아불교평화회의 총회 등을 몽골에서 개최하도록 후원
하였고, 영국의 필립 왕자가 설립한‘종교전통연합회’국제위원장을
2003년부터 맡고 있다. 국회의원, 문화부 장관, 국회의장, 혁명당 당수,
총리 등을 지내면서 그의 대외관계의 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확대되었
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런 경력과 세계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이 그의
활동에 큰 기반이 되었음은 당연하며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영향력을 발
휘하게 되었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정상회담
을 하는 그의 모습은 당당해 보인다. 몽골 국경일인 나담 축제나 연말 제
야에 모의(模擬) 칸으로서 칭기즈칸 시대의 전통의상을 입고 초원의 겔
막사에서 세계를 제패한 승리의 축배를 들면서 몽골의 제2건국에의 의지
와 소신을 역설하는 그의 눈빛은 강렬하다.



그는 현재 정치인으로서 활동하지만 그를 성장시켜 준 것은 문학이었
다. 2005년, 25년간의 문필활동을 통해서 저작한 각 장르의 작품을 8권의
전집으로 출간했을 만큼 그의 문학적 재능 역시 탁월하다. 그는 문화 대
통령이다. 문화를 아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정치논리만을 앞세우지 않는
다. 프랑스가 문화 대통령을 배출하고, 프랑스의 문화인들이 국회의원이
나 장관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바이
다. 아시아권의 몽골에서 국제 감각에 뛰어난 문화 대통령이 배출되었
다는 것은 매우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그의 전집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1권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에 대한 논설과 연설 및 축사 등이며, 2권은 몽골의 가축과 식물과 화훼에 대해서, 3권은‘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영서를 몽골
어로 번역한 것이고, 4권은 19세기 중반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서 풍자문학의 대가인 고골리의 소설《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를 번역한 것이며, 5권은 부활의 작가 톨스토이의 작품을 번역한 것이다. 6권은 영어권 소설을 몽골어로 번역한 것이고, 7권은 몽골작가 10인의 작품을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이며, 8권은 문화비평, 문학연구, 역 사 ₩문화 부흥에 대한 시론, 수필을 모은 것이다.



그의 관심이 문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와 경제, 사회와 자연 그리고
불교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 하나
만 하더라도 그의 관심은 외국 문학을 몽골에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
았다. 그는 외국 문학을 몽골에 소개하는 만큼 자국의 문학과 문화를 해
외에 소개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문학이나 문화
를 아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문화의 중요성, 역사의 중요성을 철
저히 깨달아 자기화하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약 80년 가깝도록 몽골 사
회에서 공식적으로 배제되어 있던 불교의 부흥과 그것에 바탕한 몽골역
사와 문화의 복원에 대한 노력은 그가 경험했던 다양한 국제사회에서의
경험과 몽골 전통에 대한 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6. 맺는 말
이상으로 남바린 엥흐바야르 몽골 대통령의 만해대상(포교부문) 수상
자론을 엮어 봤다. 솔직히 이 글이 완성되는 데에는 지난 15년 간의 몽골
체험과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을 비롯한 몽골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과의 교류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어느 한 방면의 전문
가란 사실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서 이런 류의 글을 쓸 수는 없
는 것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문가라고 해서 완벽할 수는 없
다. 오히려 주관적인 체험이 제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할 뿐
이다.



군말을 늘어놓은 것은 필자의 변명이기도 하지만,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탁상의 이론가나 이상론자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
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어서이다. 그
는 흔히 보이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몽골 국민들에게 몽골의 비
전을 제시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바탕에는 몽골불교와 문화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인
식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를 바탕 삼아 몽골의 미래를 지향하는 대통령!
여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건설 800주년이 되는 해에, 21세기 몽골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가는 남바린 엥흐바야르의 진면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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