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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관리자
Subject   누가 조계종의 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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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조계의 주인인가.


신라의 충담사는“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다.”라고 안민을 노래하고 있다. 僧이 승답지 못하고, 승단이 승단답지 못하고, 수행자가 수행자답지 못함에 진정 본분의 납자가 있다면 참괴의 혈루를 뿌려 참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우리 수좌들은 수좌가 수좌답지 못해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청정승풍(淸淨僧風)을 담지하지 못한 허물을 불조전에 발로(發露)참회하고자 한다. 돌이켜 반성해보면, 깨어있고 열려있는 안목으로 시대대중을 계도하고 승단의 청정성을 보지(保持)해 사자후를 외쳐야 할 수좌들이 이미 종이호랑이로 전락되어 산문은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안으로 간절한 참구로 존재의 실상을 밝히고, 밖으로 한량없는 자애로 생명을 보듬어, 지금 여기에서 바로 생사해탈의 무위법을 연설하지 못하고, 도피와 방관과 보신으로 스스로 사자충이 되어 제 밥그릇 챙기기에 열중이니 어찌 자타동업(自他同業)의 누(累)를 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에 돈수천배로 오체를 투지하고 참회를 올린다.


근자에 조계종의 교육수장이신 교육원장스님께서‘깨달음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은 원래‘이해하는 깨달음’을 말씀하셨지만 이후‘이루는 깨달음’으로 변질된 것이며, 아울러 깨달음과 역사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뇌한 흔적이 묻어있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불조의 가르침을 너무 가볍게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수행(깨달음)과 생활(역사)이 일치하지 못하는 현재의 기형적 수행행태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깨달음을 이해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고 깨달음과 역사를 이원적 시각에서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의 소지가 있다. 더군다나 전 종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원장의 견해이기에 종도들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이는 조계종의 종지 종풍이 훼손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수좌회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禪이 앉아 있음(坐禪)으로 나타나되 앉아 있음에 매몰되지 않고 바라밀행으로 드러날 때 선은 행과 하나 된 선이 되며, 행은 선을 떠나지 않는 행이 된다. 이를 일러 선수행과 바라밀행이 하나 되는 선행일치(禪行一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을 고요한 적정처(아란야, 선방)에 앉아있는 좌선만으로 규정하지 않고, 전 생활 영역에서 깨어있되 바라밀행과 하나 되는 온전한 삶 자체로 규정해야 한다. 따라서 선과 행이 하나 되는 선수행은 앉아 있지만 앉아 있음을 떠나 있고, 대상과 늘 부딪히되 대상을 떠나 있고, 사량 분별하되 사량 분별을 떠나 있다. 이와 같은 선수행을 조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날마다 객관 대상과 만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대상과 만나는 곳, 분별하는 곳을 떠나서 참구해서도 안 된다. 홀연히 지혜의 눈이 열리면 모름지기 이 모든 것이 집안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선이 좌선을 위주로 하는 깨달음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수행가풍을 유지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선원 내부에서도 자성의 소리가 일어나고 있다.‘오온굴택이 곧 선원’이라는 달마의 가르침이 무색할 정도로 선수행이 고요한 선방 안에 갇혀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자 한다.


禪이 사량 분별하는 곳에 있지 않다는 말은 사량 분별의 알음알이로 깨달음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또한 사량 분별을 떠나지 않는 참구란 사량 분별이 공함을 깨달아 공한 그 자리에서 잘 사량하고 분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분별의 알음알이가 공성(空性)임을 체득함으로써 무분별의 지혜로 드러남이 바로 깨달음이다. 무분별의 지혜가 없는 분별(이해)은 망념이요 무지요 번뇌이다. 분별망념의 번뇌가 본래 공한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번뇌가 바로 보리가 되는 것(煩惱卽菩提)이다. 그러므로 홀연히 지혜의 눈이 열리면 분별과 무분별이 집안일(中道)로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알 수 있는 정도의 이해, 즉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사량 분별에 오염된 망념 그 자체를 깨달음으로 오인하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분별 망념으로 이루어진 이해가 깨달음이 아니라 분별 망념이 공한 이치를 체득한 보리 정념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부처님과 조사가 굳이 생각 이전자리(心地)를 말하는 것이다. 생각 이전 자리란 생각 없음의 실체화가 아니라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는(念而不念) 무념(無念), 즉 생각이 공함을 깨달아 생각(妄念)을 생각 아닌 생각(無念)으로 돌려쓰는 것을 말한다. 즉 알음알이(이해)가 본래 공한 이치를 체득하여 이해 아닌 반야로 돌려씀이 깨달음이다.


만약 철저히 공함을 체득하지 못한 이해(알음알이)를 깨달음으로 삼게 되면 알음알이를 지혜로 여기게 되는 것이니 마치 도둑으로 자식을 삼는 것과 같게 된다. 그래서 생각(이해)을 따라가면 중생이요, 생각을 돌이켜 반조하면(回光返照) 수행자요, 생각을 생각 아닌 생각으로 돌이켜 쓰면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각 아닌 생각, 즉 이해 아닌 이해는 분별로써의 생각(이해)이 아닌 무분별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즉 지해의 무명을 지혜의 광명으로 돌이키는 것이 수증의 방편이다. 따라서 조사가 이르기를“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아니하여(神光不昧) 만고에 아름다우니(萬古徽猶). 이 문에 들어오면(入此門來) 알음알이(지해, 이해)를 두지 말라(莫存知解)”고 하는 것이다.


이해가 깨달음으로 환치되면 聞 〮‧ 思 ‧ 修의 수행체계 가운데 문 ‧ 사 ‧ 수가 일체(一體)가 되어 깨달음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오직 思의 영역만으로 깨달음을 삼게 되는 격이니, 닦음(修)의 원인이 없는 분별 망념으로 닦음의 결과인 깨달음을 삼는 것이 된다. 여기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 생각(一念)은 안(六根)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六塵)에 있는 것도 아니며, 안과 밖이 만나는 데(六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육근 ‧ 육진 ‧ 육식을 떠나서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안도 공하고 밖도 공하고 안과 밖이 만나는 인식(이해) 자체도 공하기 때문에 생각이 생각 아닌 생각, 즉 지혜로 드러남을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 하였다.


물론 선문에서도 깨달음에 해오(解悟)와 증오(證悟)가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해오는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깨달음을 말하고 증오는 지혜로 체득한 깨달음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해오조차도 중생의 사량 분별로서의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해오를 굳이 설명하면 발심하여 정견을 갖추고 수행을 통해 한 번 가슴이 시원함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수준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깜깜한 밤에 더듬거리며 길을 가는 국면이라면, 해오란 이때 벼락이 한 번 처서 찰라지간에 사위가 밝아져 순간적으로 분간되어지는 상태를 말함이니 이해와 해오 사이에도 이와 같은 간극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해오조차도 선문에서는 가차 없이 배척하고 실참실오(實參實悟)로 증득된 깨달음인 증오를 귀하게 여기는 마당에 어찌 연기를 이해하는 정도를 가지고 깨달음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구경의 진리와 상응한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선문에서는 이해하는 알음알이가 아닌“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 것(以悟爲則)”을 철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가 말하기를“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가슴속 밝음이 백천 개 일월과 같아서 시방세계를 한 생각으로 밝게 통달하여 한 티끌도 분별심이 없을 것이니 비로소 구경과 상응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깨달음의 세계는 마치 번뇌 가운데 있되 번뇌를 떠남이며, 허공 가운데 있되 허공을 떠난 경계이다. 이를 어찌 알음알이의 이해로써 체득할 수 있는 경지이겠는가. 물속에 있는 물고기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 물을 떠나야 물이 보이고, 허공에 있는 인간도 허공 속에 있으면서 허공을 떠났기 때문에 허공에 머무는 것이다. 번뇌 속에서도 번뇌의 공성을 보면 번뇌를 떠나게 되고, 생각(이해)하면서도 생각의 본질을 보면 생각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닌 깨달음의 경계이다.


교육원장스님께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말한 깨달음은 원래‘이해하는 깨달음’이었으나, 이후‘이루는 깨달음’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부처님께서 니까야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설하고 있는 선정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간과한 주장이며, 역대 조사가 고구정녕 설파하신 수증의 종지를 훼손하는 견해이기도 하다.


조사선의 가르침은 중생이 본래부처(衆生本來成佛)임을 확신하는 바탕위에서 존재의 실상을 참구하는 것이다. 화두참구는 화두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 의심(의정)이라는 무규정(무분별)의 효용을 통해 일념의 空性(본래면목, 본래부처)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에서의 수행과 깨달음이란 중생이 본래 깨달아 있음(本覺)의 바탕위에, 지금 현재 번뇌망념에 덮여 못 깨달음(不覺)을 지양함으로써 새롭게 구현되는 생사해탈의 지평(始覺)을 열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깨닫지 못한 중생이 깨닫지 못한 모습(衆生相)을 부여잡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루어야 하는 깨달음’이라고 따로 말해도 맞지 않다. 그러나 중생의 깨닫지 못한 번뇌 망념으로써의 알음알이(이해)를 그대로 깨달음이라 착각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이루는 깨달음’이 없다고 말해도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해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알음알이이다. 이루어 가되 이루어 감의 상(相)마저 극복된 깨달음일 때 역사와 하나 되는 보디사트바가 되는 것이다.


보디사트바가 구현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을 통해 영적신비를 체험하는 것도 아니며, 고통과 질곡의 현실을 떠난 적정의 삼매를 얻는 것도 아니다. 고통과 질곡의 현실이 공함을 체득하는 수행 자체가 존재와 세계의 실상을 밝히는 과정이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밝히는 역사해탈의 과정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역사는 하나이되 둘이요, 둘이되 하나의 장으로 드러나는 보디사트바의 바라밀행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교육원장스님께서 이러한 내용을 몰라서 한 주장이 아니라, 신앙과 수행의 영역에서 회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님께서는「깨달음 그 이후』말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설사‘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현실역사에서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더라도 그의 깨달음은 훼손 받지 않는다. '이루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실제현실에서 곧바로 스스로의 괴로움을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도 없애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보지도 못했고, 그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러한 주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교의 핵심교설이라고 할 수 있는 수증방편에 대해“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고, 그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식의 회의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수증의 역사에서 유명무명의 수많은 선사(先師)들이 수행과 깨달음을 위해 목숨을 건 구도의 행각을 통해 면면부절 정법안장을 이어온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엄격히 말하면, 이해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의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되어질 수 없으며, 훼손 받을 만한 깨달음 자체가 있을 수 없다. 보디사트바를 생각으로 머리로 관념으로만 이해한다면 영원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디(깨달음)와 사트바(역사)가 하나로 융회된 삶을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배우는 위치에 있는 학인의 견해라면 모르겠거니와, 종단의 교육을 책임진 원장의 자리에 있는 분의 견해이고 보면 문제는 자못 심각해진다.


관념의 깨달음과 관념의 역사인식으로는 중생의 고통을 열반으로 돌이킬 수 없다. 그림의 떡으로 배를 채울 수 없고, 악어의 눈물로 중생을 애민이 여길 수 없다. 깨달음과 역사, 보디와 사트바의 구현이 여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는 종단의 암담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조계종은 종단 수뇌부를 중심으로 한 일부 범계자들이 화려한 대웅전의 단청 뒤에 숨어 은처, 도박, 절도, 간통, 술집출입, 파당형성, 나눠먹기 등 온갖 말법의 폐풍을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범계행위가 만연하여 종단이 그 근간으로부터 흔들리고 있음에도, 감히 누가 주인이 되어 파사현정의 당간을 세우려고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불법에는 은처승이 없다. 불법에 대처승이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정화의 깃발을 내건지 겨우 반세기를 지나 다시 은처라는 범계문제가 승속에 회자되고 있는 참혹한 종단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선의 종가를 표방하고 있는 용주사의 주지가 은처 의혹에 휩싸여 유전자검사를 종용받고 있는 전대미문의 희극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현실은 이 의혹의 당사자들을 정파적 이익과 호적상 독신임을 주장하며 끝까지 비호하고 있는 종단 집행부의 비승가적 태도이다. 의혹의 당사자는 이것이 사실이면 지금 즉시 승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과 아버지로서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며, 만약 무고에 의한 명예훼손이라면 즉각적인 법적조치로 명예를 회복하고 제기자들을 무고죄로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호법부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 대한 회유와 압박과 처벌을 즉각 중단하고 율장과 종헌종법이 명시한대로 공명정대하게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초록은 동색이라 그런지, 아니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서 그런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 재가자들이‘소가 절문을 들어가도 침묵하는 종단’이라고 비아냥하는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리고 있다. 종단의 근간을 흔드는 범계가 일어날 때마다 침묵하고 버티는 집행부의 저의가 무엇인가. 그러면서 청규를 제정하여 봉정하는 전도된 행태를 목도하면서 누가 이 종단을 정상이라 여기겠는가. 집행부는 하루빨리 분명히 시시비비를 밝혀야 한다.


정녕 대승의 수행자는 깨달음과 역사가 하나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부단히 계정혜 삼학을 근수해야 한다. 그래야 수행의 근간이 유지되고 인천(人天)의 사표로서의 위상이 정립될 수 있다. 청정승풍과 정법안장이 무너진 승가는 더 이상 단월의 귀의처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조계종의 범계일탈과 정법수행이 결여된 풍조는 승단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부처님 교법 자체가 훼멸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불법이 쇠멸되는데도 수수방관하면서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한다면 이는 분명 마군의 행태이다. 반드시 대중의 준엄한 궐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안으로 눈푸른 안목으로 보디를 구하고 밖으로 분연히 사트바를 구현하여 보디와 사트바를 융회한 본분종사가 되자.


불기 2559년 10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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